▲ 시로타 스즈코 할머니 사진 (출처: 한겨레 신문사)

[수완뉴스=일본 가니타 부인의 마을] 박정빈, 여러분은 우리나라 최초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증언자이신 故  김학순 할머니 보다 7년 앞서 일본 ‘가니타 부인의 마을’에서 일본군 위안부 증언자가 나온 사실을 알고 계셨나요?

시로다 스즈코(1921~1993년) 라는 가명의 이름을 가지신 일본인이 그 주인공 이십니다.

시로다 할머님은 이 마을에서 생활을 하시다가 어느 날부터 잠을 잘 이루지 못하고 너무 괴로워 1983년 가니타 마을을 처음 만드신 후카쓰 후미오 목사(현재 사망) 에게 처음으로 자신이 일본군 ‘위안부’ 가 되어 끌려 다니면서 겪었던 고통을 이야기 합니다.

시로다 할머님의 증언에 충격을 받은 후카쓰 목사는 1년 동안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로 충격을 받으셨다고 합니다.  또 시로타 할머님은 그 이후에도 계속하여 꿈에 ‘남쪽 팔라우 제도’에서 함께 지내다가 죽어 돌아오지 못한 조선인 소녀들이 나타나 “돌아가고 싶어요. 병사들을 죽여 버리고 싶어요.”하며 울부짖는 통에 너무 괴로워 그곳에서 아직까지 고통 받고 있을 조선인 소녀들의 혼을 어떻게든 달래주고 싶어 “아! 종군 위안부”라는 말이 새겨진 ‘진혼비’를 세우셨다고 합니다.

이 진혼비는 마을의 교회당에서 언덕 위쪽으로 난 작은 오솔길을 따라 10분쯤 오르면 ‘거울해안’이라 불리는 다테야아만의 한편에 세워져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또 하나의 의문점이 생깁니다. 그 시대 일본도 역시 가난한 집은 먹을 입을 줄이거나, 돈을 벌기 위해 딸을 매춘으로 파는 집이 꽤나 많았을 테고, 일본군‘위안부’에 끌려간 일본인 소녀들의 자료 또한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왜 시로타 할머님의 첫 증언과 우리나라의 첫 증언자인 故 김학순 할머님의 증언 사이에 7년 이라는 시간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일본인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증언은 나오지 않는 것일까요? 남한, 북한, 중국, 대만, 필리핀, 네덜란드 에 많은 증언들은 이 뒤에도 많이 나왔는데 말이지요. 아무래도 아마하 수녀의 “일본에서는 돈이 필요해서 돈을 벌려고 그 참혹한 사실을 조금이라도 알면서도 스스로 가지 않았냐? 그것은 너의 책임 아니냐?”말이 맞을지도 모릅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자신이 일본군‘위안부’ 였다는 사실을 고백하기 어려워 더 이상 일본인 여성들의 증언이 나오지 않는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제는 피해자 분들도 많은 분들이 고인이 되시고 얼마 남지 않아 지금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라도 진실을 알고 제대로 된 올바른 사과를 받아내야 합니다. 그래서 진정성 없는 사과만 받고 눈을 감은 소녀들과 할머님들의 혼을 달래주어야 된다고 굳게 믿습니다.

 

 

*주석

  • 가니타 여성 마을 : 매춘으로 인해 사회로 돌아갈 수 없는 여성들을 위해 1984년 후카쓰 후미오 라는 이름을 가진 목사님께서 여성들의 재활을 위해 만든 마을입니다.
  • 인터넷에서 진혼비의 사진은 나와 있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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