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 편집부의 사정으로 정병기 씨와의 인터뷰 기사 송출을 예정보다 지체된 점에 관하여, 후손 분과 취재를 요청주신 도화지 단체에 사과드립니다.

[수완뉴스=인터뷰] 김동주 기자, 진민식 도화지 대표

정병기 씨 (독립운동가 정용선의 후손)

– 저는 (조선초기 개국공신인) 정도전 선생의 24대손입니다. 정도전 선생에 대한 것은 역사를 공부한 사람이라면 잘 아실거에요. (네, 용미어천가…) 네, 경국대전에서부터 시작해서 그런 과거의 왕권 시절에서 백성이 좀 더 우대 받는 시대를 만들려고 개혁 드라이브를 시작한 당대 최초의 정치가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선조이지만, (일제강점기 때 독립운동을 하셨던) 할아버지를 찾는 다는 건 과거의 역사를 잊으면 현재를 알 수 없고, 미래를 예측할 수 없습니다. 우리이 과거 역사를 아주 소중하게 생각해야 하는데, 지난 (70년) 해방 이후에 친일파들이 정권을 잡으면서 독립 운동가들의 빚이 퇴색되었어요. 그들이 친일을 했던 사람들이기 때문에 부끄러워서 무얼 못하거든. 그래서 여러분들이 역사를 연구하고 잘못된 역사를 바로 잡고 또,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는 역사적인 무거운 짐을 스스로 지고자, 이렇게 만나게 된 것을 기쁘고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 성함하고 생년월일 말씀해 주실 수 있으신가요?

– 1959 년 12 월 22 일로 호적이 되어 있고, 원래는 1958년 11월 19 일이야.

 

 – 그럼 1년 늦게? 그때는? (호적 신고를) 그럼 성함은 어떻게 되시나요?

– 그렇지. (이름은) 정자, 병자, 기자, 한자는 柄(나라 병) 基(터 기)자야.

– (고향은) 우리 아버지 고향은 경북 봉화군 충향면 도심리. 나는 경기도 양평군 지평면 옥현리가 고향이야. 시골에서 고등학교를 나왔고, 그다음, 여러 가지 이유로 경찰에 근무했다가, 82년도에 강도 살인범을 잡아서, 중상을 입고 국가유공자가 되었는데, 학력은 마흔두세에 방송대 법대에 입학했다가 마흔아홉세에 졸업을 했어요. 오늘 나는 학생이라고 이야기를 하지 않았는데 학생증 있으면 가져오라고 해서 특별히 이거는 법학과 학생증이고 이거는 행정학과 학생증이야.

법학과는 99학번이라 이미 졸업을 했고 , 행적학과는 (몸이 아파가지고 졸업을 하지 못했고) 행정학과는 05학번이야. (아마도 여러분들하고는 앞설 거야 학번이….) 오늘 찾아서 이렇게 귀한 학생증을 가져오니까, 10년이나 젊어진 느낌이야. (참고로) 나는 방송대 총학생회 정책위원장을 맡고 있어. 조기현 방송대 총장 표창도 받고 졸업했어.

 

 – 원래 하셨던 일은 경찰로 근무를 하신거에요?

– 그렇지. 그리고 경찰을 그만두고(경찰을 나와서는), 자영업을 했지. 먹고 살려고.

 

 – (경찰 근무 시절) 그럼, 경위로?

– 경찰도 완전 경찰도 아니였어. 12:1경쟁률을 뚫고, 전투경찰대에 들어갔어. 제주도에 근무하다가 서울에 발령 났다가, 강도 살인범을 잡으러 갔다가…많이 잡았는데, 다쳐서 인생이 망가진 거지. 수혈을 잘못해가지고 25년 간경화를 앓다가 작년부터 간암을 알게 되어 이번에도 간암 수술을 했거든.

 

 – 그다음에 그럼 자영업?

– 그렇지. 그다음에 그래서 자영업을 했지 먹고 살기 위해서.

 

 –  아!

–  연탄장사, 쌀장사… 한 9년 했고 슈퍼마켓, 여러 자영업을 많이 하면서 2003년, 2008년 경매를 하면서 좀 재미를 봤어 (정정당당히. 낙찰도 여러번)

– 법학과를 나와서, 법률적인 지식이 부족한 불우이웃을 위해 고소장이라던가, 내용증명이라던가 도움을 주었어. (돈을 받지만 않으면 변호사법 위반이 아니기 때문에) 그동안 배워온 지식으로 도움을 많이 주었지. 내가 배운 지식을 중화뉴타운으로 인한 잃어버린 12년에도 담았지.

 – 그럼 일단, 증조부님의 업적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주시겠습니까?

–  아, 우리 증조부…나는 직접 뵙지 못했지만 존함은 정자, 용자, 선자를 쓰시고, (생년월일은) 1883년생 10월 17일생. 소화 명치16년생인가 해. 우리 할아버지께서는 정도전 시조의 21대손으로, 고향은 경북 봉화군 춘향면 도심리에서 살고 계셨는데, 강제 병합이 돼서 국권이 피탈당하니까 나라를 찾아야 하겠다는 일념으로 군자금 모금 운동을 같은 지역의 법전면 척곡리에 있는 척곡 교회 1907년도에 세워진 교회에서 군자금 운동을 해가지고 그 군자금이 만주 간도 명동 지역으로 전달되었다고 합니다.

(진민식 대표: 아 그쪽…)

우리 할아버지는 여기 저기서 돈을 가지고 오는 군자금 총책으로 최일선에서 활동하셨습니다.

소를 끌어온다거나 방화를 한다거나 친일파 돈을 터는데, 그렇게 모아진 돈을 털어가지고 교회에 가져다 놓으면 교회에서 현물은 처분하고,(예를 들어 쌀이나 소 등) 만주 간도로 가져가는 전달책은 따로 있었다고 하더군요. 증언자가 계속 나왔어요.

 

 – 아, 그렇군요. 그런데 현재 인정을 받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 아, 우리 할아버지가..이제 우리 아버지가 기록이 없고 말로만 들은 것이 있는데 너희 할아버지는 형무소에서 돌아가셔가지고 이담해 나라가 잘 살면 정부가 찾아줄 것이다. 얘기해주셨는데 (자료를 보여주며) 이것과 보시다시피, 우리 아버지가 기록이 없어가지고 내가(정병기씨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돈을 벌 것인지 할아버지의 기록을 찾을 것인지 상당히 고민하다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받치신 할아버지의 명예를 찾는 것으로 결정했습니다.

할아버지가 지내셨던 그 형무소에서는 많은 중형범들이 옥사했는데 그 분들이 거기서 형기를 살면서 붉은 벽돌을 생산해 내는 강제 노역에 시달렸습니다. 강제노역과 고문에 시달리며 굶주림에 돌아가시게 된 계기인데, 정부는 아무것도, 마포형무소에서 노역을 하면 돈도 있었을텐데 아무것도 전해주지 않으면서, 정작 정부는 마포 경성 형무소를 철거해버렸어요. 저는 지난 정권들이 정말 몹쓸 짓을 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또, 형무소 터에는 서울지방법원과 검찰청이 들어와 있는데, 이 건물들은 애국지사들을 두 번 죽이는 짓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분들이 칼에 시달렸는데 그 자리에 우리나라가 해방되고 나서, 이 자리에 검찰청과 법원을 짓는다는 건 애국지사 혼령을 또 죽여버리는 것이 아닌가…그래서 내가 마포 경성 형무소 역사 기념관 건립 운동을 10년째 하고 있어요. TV에도 몇 번 나왔는데, 그동안 정부는 관심이 없었는데, 이제 문재인 정부에서는 “잘못된 역사를 바로 쓰고,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겠다”는 슬로건을 걸고 있기에, 기대를 하고 있어요. 그리고 내년 3.1절 심사를 다시 하는데 그때 좋은 소식이 있지 않을까 작은 기대를 하고 있어요.

– 정부가 지금 소장하고 있어야 할 당시 (그 당시 독립운동가들과 관련한 형사 기록) 기록들이 모두 사라졌어요. 이에 대해 정부는 6. 25 전쟁 당시 모두 불탔다 라고 핑계를 대고 있어요. 그러한 귀중한 자료들이 전쟁이 난다고 하더라도, 정부가 관리를 했어야 하는 것이지, 그 귀책사유를 후손들에게 떠넘기고 찾아오라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행동이라고 주장하고 싶어요.

 

 –  그럼, 국가에 대하여 서운하신 점이 있으신가요?

정병기 씨 : 있죠. 제가 40년을 노력해 보았지만, 정부는 계속해서, 똑같은 문건만 보내오며 앵무새 답변을 하고 있습니다. 다 가져오지는 못했지만 보여드리는 자료를 보시면, 오히려 나보고(정병기 씨에게) 거증자료를 가져오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정부가 찾아야 하는 것이고, 일본 영사도 안타깝다고 말하고 있고, 일본법무성에 편지를 보내서 찾아보려고 노력했지만, 정작 도움을 받아보지 못했어요.

수백장의 공문서도 똑같은 내용이고, 이번에 광화문1번가에도 접수를 하였지만, 아직 답이 없습니다. 저는 우리 할아버지대 이후, 21세기에 독립운동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  저희가 3일 전에도 인터뷰를 하였는데, 혹시 김대략 선생님이라고 아세요?

–  그 분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아) 여기 중요한 자료가 있어요. 정부가 나머지 있었던 (증조부 관련 독립운동가 파일) 자료들을 모두 폐기하였다는 관보가 있어요. 그리고 그마저 있었던 자료들도 80년대 전두환 前 대통령 시절, 대통령의 지시사항으로 모두 폐기한 상태라고 합니다. 이어, 정부는 계속 후손들에게 거증자료를 가져오라고 하고 있고, 정부가 찾아야 하는 것을 후손들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건 올바르지않은거에요.

증조부를 포함하여 독립운동가 관련하여, 구 마포형무소 자리에 기념관을 설립해야 한다고 계속 주장하고 있어요. [….영상 참고]

 –  그럼, 정부에서 지금 말하는 가져오라는 자료들을 가져오라는 것은 정확히 어떤 자료를 말하는 것인가요?

정병기 씨 : (정부에서는 거증자료로) 수형인명부와 판결문을 가져오라고 하는데, 그것은 증조부나, 내가 가지고 있는 자료가 아니라, 정부가 관리하고 있는 자료인데, 아까 관보에서처럼, 정부 지시하에 폐기하였는데, 정부가 찾아야 하고, 책임져야 하는 것을 나에게 온전히 책임을 떠넘기는 것은 옳지 않고, 앞뒤가 안맞습니다.

 

 -지금, 증조부님처럼, 당시 자료가 소실되어, 독립운동가로서 인정을 받지 못하는 분들도 많이 계시나요?

– 그런 사람들이 많죠. 정부가 독립운동가로 인정을 해주지 않으니까, 먹고 살기 어려워요. 그냥 살기 어려운 것이 아니라 찢어지게 어려워요.

증조부 님을 독립운동가로 인정받게 하려고, 미국의회에도 영문편지를 보내서 미국의 도움을 받으려고 하기도 하였고, 연세대 신구본 교수도 도움을 주었는데, 나를 도와준다고 해놓고, 박사학위 받고는 역사문화연구소장으로 있는데, 현재 연락이 없어요. 매일경제에도 나와 증조부와 관련한 기사가 실린 적도 있어요.

 

 -그 당시, 경성형무소면 독립운동가가 아니면 들어갈 수 없는 곳이 아니였는지요?

 – 그렇지. 그렇죠. 거긴 한번 들어가면 못 나와요. 작년에 (2016년) 경북 봉화군의 문화원장이 우리 사연을 보고, 이 분은 충분히 (독립운동가)로 인정을 해줘야 한다고, 국가보훈처에 보냈는데도, 국가보훈처는 이에 대한 인정이나 답을 주지 않고 있어요. 문화원장이 개인적인 사람도 아니고, 공인임에도 국가보훈처가 앞뒤가 막혔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어요.

 –  독립운동가 후손들이 하도 못산다고 하니까, 우리 증조부 (정용선 씨를)를 족보에서 파버렸어요. 우리 할아버지의 산소도 찾아볼 수 없어요.

 

 – 그러면, 시신도 못 찾았어요?

– 못 찾았어요. 그 시신만 찾을 수 있어도, 훨씬 지금보다 상황은 좋지. 지금 보여드리는 자료가 중요한 자료에요. 일정시대 당시, 경북경찰국에서 수사를 하라는 공문서가 있는데, 혹시나 우리 할아버지 이름이 있나 찾아보았는데, 당시 증조부가 가명을 썼는지, 이름을 찾지를 못했어요.

 

– 최근에는 외교부에서도 우리 증조부가 독립운동가가 맞다라고 확인을 하였어요.

 – 아, 우리나라 외교부에서도 인정을 한 것이네요?

–  그렇죠. 그러나, 국가보훈처가 그것을 받아들이고 있지 않은 것이죠.

 

 

 

카테고리: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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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개의 댓글

정병기 · 2018년 3월 2일 오전 9:04

옥사기록 담긴 제정호적 제시해도 탈락
증조부 항일독립운동 옥사 자료찾아 40년 고군분투 KBS독립운동가 기록찾기 위해 증손자 40년의 노력 이제 정부가 나서 그 명예 찾아줘야 당연지사, 옥사자 구천을 맴돌고 있는 신세다. 기가 막힌다. https://t.co/eHrF9y3F1D https://t.co/ZPnBGnAby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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