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채보상운동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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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완뉴스=임윤아 칼럼리스트] 1901년부터 1910년 사이 국가가 타국에 빚을 지게 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점차 불어난 돈을 국민이 갚게 되는 상황이 발생하는데, 이곳에 수많은 독립운동가와 여성 단체가 참여했다. 감동적인 것은 크고 작은 지불액의 문제가 아니라, 점차 국채 보상 운동이 알려지면서 전국구에서 일어났다는 점이다.

나라를 살리는 것이 개인과 사랑하는 이들을 지키는 일이라는 걸 몸소 실감하고, 보여준 사례다. 29군데의 여성 단체는 자신의 폐물과 장신구, 현금, 화폐, 곡식, 밥을 반으로 절약하여 쌀을 내기도 하였다. 은가락지, 은비녀, 반찬을 절약하는 것으로 도움을 주었다. 신분이 양반부인이든, 신여성이든, 기녀든, 기독교부인이든, 전직관인부인이든,상관 없었다. 신분과 출신과 별개로 자신의 뜻을 세상에 전한 것이다.

국채보상가가 나오기도 했으며, 국민적 운동으로 확신되었다. 그러나 일제는 일진회 등을 통해 방해공작을 펼쳤다.애국적인 언론, 정치, 사회활동을 규제하기 위해 보안법과 신문지법을 제정, 공표하였다. 이로써 핵심적 단체인 대한자강회가 강제 해산되고, 언론 활동이 위축되었다.

[대한매일신보]의 양기탁, 베델 등은 일제의 탄압과 이간책동에도 불구하고 민중과 밀착하여 운동을 일관되게 추진해 나갔다. 일제는 이러한 [대한매일신보]에 대한 탄압의 일환으로 영국인 베델을 추방하고자 하였지만, 실패했다.그러자 국채보상금을 횡령했다는 ‘국채보상금소비사건’을 날조하여, 국채보상운동의 기세를 꺾고자 하였다. 양기탁이 보상금 횡령으로 구속된 뒤, 무죄선고를 받긴 했으나, 의구심으로 인해 결국 기세가 꺾이고야 만다. 일제의 방해로 말미암아 좌절되었으나, 국권회복운동의 밑거름이 되었다.

단합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이며, 국민의 도리와 의지를 표출해낸 운동이다.

내용 참조 국채보상운동기념관 

놀라움의 연속이었던 국채보상운동. 점차 불이 들어오며, 전국으로 확대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지도 역시 하나의 인상으로 번졌다. 국민으로써 가져야할 얼굴이 어떤 것인가에 대한 대답이 바로 이곳에 있다.